친환경, 지속가능성,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라는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접하는 모든 영역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우리에게 다소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편리함을 위해 사용하는 많은 것들이 때론 인류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다소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많은 일들이 이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움직임들이 일찌감치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서울 용산의 한 주택가 레스토랑에서도 포착됐다. 친환경이라는 가치가 이젠 당연한 것이 되었고,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고 이야기하는 레벨 제로(Level:0)가 그 주인공이다.

레벨제로는 현대미술과 같이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요리에 공간의 이동이라는 행위를 더해 즐길 수 있는 쇼룸 콘셉트의 새로운 파인 다이닝이다. 가든, 원테이블, 바 등의 세 개로 나눠진 공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의 다이닝 메뉴와 페어링 구성을 즐길 수 있도록 돼 있으며 모든 재료와 식기, 공간 등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가치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고객들은 이 세 개의 공간을 이동하면서 때론 스탠딩으로, 때론 좌석에서 음식을 즐기게 된다.
매장에서 사용되는 식재료 중 소고기는 전남의 푸른마을목장에서 가져온다. 그 곳의 소는 말 대로 푸른 목장에서 오로지 풀만 먹고 자라기에 성장이 다소 느려 한 달에 겨우 두 마리만 도축을 한다. 생선은 바라몬디라는 농어과 생선으로 수질관리에 있어 최고등급을 받은 싱가포르 양식장으로부터 제공 받는다.
이처럼 준비되는 재료 하나하나가 단순히 먹고 없애는 음식이 아니라 생태계를 생각하는 의미 있는 소비를 추구한다. 당연히 메뉴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환경을 생각하고 고민하며 웨이스트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식기 역시 버려지는 계란껍질을 재활용한 식기라든지 플라스틱팩을 녹여 만든 식기를 사용하고, 매장 내 배치된 가구들 역시 친환경 소재를 활용해 만든 테이블이라든지 재생지로 만들어진 조명 등으로 공간을 완성했다.


◇ 레벨제로를 이끌고 있는 Denny Han
레벨제로의 Denny Han 셰프는 호주에 있는 Vue de monde, Attica 등 파인 다이닝 쪽에서 10년간 일했다. 그 중 Attica는 호주에서도 가장 유명한 식당이자 세계 50위 안에 들어가는 파인 다이닝 중 하나이다.
코로나로 주변의 환경에 변화가 생기며 자연스레 한국에 들어오게 된 그는 “호주에서 셰프로 처음 활동을 시작하며 현지의 식당에서 제로 웨이스트, 친환경 등 식문화 트렌드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지금의 레벨제로의 메인 셰프로 일하게 된 계기도 이런 지속가능한 트렌드가 한국의 레스토랑에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진정한 가치를 따라 움직이는 삶이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이다.
“오히려 호불호가 있는 식당이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좋아한다는 건 그 식당만의 특유의 색깔이 없다는 것과 동일한 뜻이기도 하다. 나는 레벨제로만이 추구할 수 있는 가치와 레벨제로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하고 싶다. 그래서 공간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나름의 이유가 있는 요리를 만들고 있다.”
그의 말처럼 그가 선보이는 요리에는 그가 미래 환경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유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 셀린박 갤러리와의 콜라보레이션
최근엔 셀린박 갤러리의 ‘Future Food(혀가 느끼는 고민)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국내와 해외에서 온 예술 작품들로 레스토랑 곳곳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미래 식환경’의 모습을 다양한 작품으로 보여주며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미래의 환경과 먹거리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또한 각 작품에서 받은 영감을 통해 만들어진 메뉴들은 12가지의 코스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Anthropocene Epoch’는 노루궁뎅이와 비트, 콜라비, 마카다미아를 메인 재료로 육류를 조리하는 테크닉인 에이징과 스모킹을 버섯에 적용해 식감을 닭고기와 비슷하게 표현해냈다. 무차별 사육, 소비되는 치킨 산업에 경종을 울리는 위한 ‘Pink Chicken Project’가 이야기하는 공장식 축산의 비윤리적인 시스템과 인간의 생존을 위해 희생되는 생명체들에 대한 윤리의식을 간접적으로나마 전달하고 있다.

◇ 파인 다이닝에서 가치를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으로
레벨제로는 단순한 파인 다이닝 중 하나일 것 같지만 Denny Han 셰프는 음식을 통해 손님들과 소통하며 가치와 생각을 나누는 단계에까지 도전하고 있다. 물론 제로 웨이스트를 100% 실천하긴 불가능하다. 하지만 Denny Han 셰프는 이야기한다.
“레벨제로가 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는 친환경이지만 이젠 더 이상 친환경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모두가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단순히 이 곳을 찾는 손님들이 맛있다, 배부르게 잘 먹었다는 휘발성 있는 가치를 좇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이 땅과 환경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파인 다이닝으로 맛있는 음식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경험할 수 없는 여운을 주는 음식을 제공하고 싶다.”
레벨제로가 추구하는 가치는 어쩌면 아직 형이상학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과 곁들여지는 이곳에서의 경험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기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소비자들도 이젠 당장의 편안함보단 내일을 위한 불편함을 감내할 각오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