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선장 역할을 맡는 최고경영자(CEO)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 특히 CEO는 조직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기업 성과를 결정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 CEO 역량과 선택이 가장 큰 요인이라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 그만큼 CEO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의 리테일 산업 역시 다르지 않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한국 CEO의 평균 재임 기간은 글로벌 평균보다도 훨씬 짧다. 대내외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만큼 기민하게 시장 변화에 대응하려는 차원으로 풀이된다”면서 “특히 일반 고객을 상대하는 유통기업의 경우 외부 환경의 변화 속도가 상대적으로 빠르기 때문에 리더십 교체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요즘 리테일 산업은 리더십의 덕목에 대한 중요성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다. 최근 국내 대표 유통기업으로 꼽히는 신세계에서 역대급 물갈이 인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9월 20일 신세계그룹이 발표한 정기 임원인사에 수많은 유통기업들의 눈이 쏠렸다. 전체 계열사 40%가량(25곳 중 9곳)의 대표를 한꺼번에 물갈이한 데다, 그룹의 핵심인 백화점(신세계)과 이마트 대표를 동시에 교체했기 때문이다.
발표 시점도 특별하다. 지난해 신세계그룹은 정기 임원 인사를 10월에 단행했지만, 올해는 처음으로 한달 앞당긴 셈이다. 통상적으로 기업들은 다음해 경영계획을 9~10월부터 수립하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리더십을 교체해 사업구조 재편에 나서겠다는 이유로 풀이된다.

지난해 3월부터 신세계 백화점을 이끈 손영식 신세계 대표는 원래 임기(2025년 3월)를 채우지 못하고 퇴진했다. 손 전 대표는 신세계디에프 대표 재임 시절 이른바 ‘3대 명품’으로 불리는 샤넬, 에르메스, 루이비통 매장을 모두 유치하는 능력을 보이면서 중용됐는데, 이번 인사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손 전 대표가 떠난 신세계 대표 자리에는 박주형 현 신세계센트럴시티 대표를 내정했다. 박 대표는 40년 가까이 신세계 그룹에 근무하면서 그룹의 주요 계열사를 두루 거친 인사다. 박주형 대표는 신세계센트럴시티 대표도 겸직한다.

가장 충격적인 인사는 강희석 이마트·SSG닷컴 대표의 교체다. 강 전 대표는 임기(2026년 3월)를 2년 이상 남겨둔 채 자리를 떠나게 됐다. 컨설팅펌 출신의 강희석 전 대표는 2020년 이마트 사상 최초의 외부 인사 출신 대표로 선임된 이후 현재까지 이마트의 온·오프라인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특히 정용진 부회장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 지난해 실적이 부진한 가운데에서도 유임이 결정됐다. 강 전 대표는 신세계그룹의 G마켓 인수부터 통합 멤버십 ‘신세계 유니버스’ 출시 등을 이끌면서 이마트의 다양한 변화를 이끌었는데, 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이마트는 현재 한채양 전 조선호텔앤리조트 대표가 이끌고 있다. 한 대표 역시 2001년 신세계 그룹 과장으로 입사해 신세계에서만 22년 몸담은 인물이다. 그룹 내에서는 재무와 기획 능력이 뛰어난 인사로 알려져있다.
특히 이마트는 이마트, 이마트에브리데이(SSM), 이마트24(편의점) 등 오프라인 유통 사업군을 하나로 묶어 ‘One 대표’ 체제로 전환했다. 각기 다른 오프라인 유통 업태의 통합 운영을 통해 시너지를 창출하고 수익성을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그만큼 한채양 대표의 책임감이 무거운 상황이다.
현재 신세계푸드 수장을 맡고 있는 송현석 대표는 신세계푸드와 주류 사업을 담당하는 신세계 L&B 대표를 겸직한다. 그룹의 식음료 사업 전반의 지휘봉을 잡게 된 셈이다. 송 대표는 신세계푸드 사상 첫 외부 출신 대표로 급식 수주 확대와 노브랜드버거 가맹 확장으로 팬데믹 위기를 극복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용됐다.
또 신세계라이브쇼핑 대표에는 신세계 신성장 추진위 이석구 대표가 내정됐다. 이석구 대표는 그룹 내부적으로 경영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스타벅스커피코리아(현 SCK컴퍼니) 대표 당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세워 국내 커피 시장을 휘어잡았다. 업계 최초로 스타벅스 카드와 드라이브 스루 매장을 선보였고, 모바일 주문 시스템인 ‘사이렌 오더’의 도입을 추진한 것도 이 대표다. 1949년생으로 신세계그룹 내 최장수 CEO이기도 하다.
신세계그룹의 미디어사업 자회사인 마인드마크 대표에는 콘텐츠 비즈니스 전문가인 김현우 대표를 외부 영입해 대표로 내정했다. 더블유컨셉 코리아 대표에는 이주철 지마켓 전략사업본부장을 내정했다. 신세계그룹 측은 “계열사 간 시너지를 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서 “경영환경을 정면돌파하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실행력 강한 조직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정기 임원인사의 특징은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직접 참여했다는 점이다. 최근까진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이 인사를 이끌었는데, 주체가 바뀐 것이다.
◇ 신세계가 계열사 대표 40%를 바꾼 이유

파격 물갈이 인사의 키워드는 ‘신상필벌’이었다. 신세계그룹 전반의 실적이 그만큼 나빴다. 그룹의 핵심 유통채널인 이마트는 올 상반기 매출 14조4065억원과 영업손실 394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매출은 1.8% 소폭 늘었지만 영업이익이 적자 전환했다.
별도 기준 이마트는 2분기 매출 3조9390억원, 영업손실 258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매출은 0.5% 줄었고 적자 규모는 67억원 늘었다. 이마트는 체험형 콘텐츠를 강화한 ‘미래형 이마트’로 전환하기 위해 리뉴얼 투자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는데, 이게 수익성 악화로 이어졌다. 주요 자회사들의 부진도 문제였다. 신세계건설, SCK컴퍼니(스타벅스코리아), 신세계프라퍼티, 이커머스(SSG닷컴, G마켓)의 실적이 시장 기대치를 밑돌았다.
이마트의 실적 악화는 주가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마트의 주가는 현재 7만원대를 횡보하고 있는데, 최근 3년 새 최고치였던 19만1500원(2021년 1월 15일)과 견줘 거의 3분의 1 토막이 났다. 미래 전망도 밝지 않다. 남성현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인플레이션에 따른 구매력 하락으로 식품관련 및 제수용품 소비 등이 둔화했다”며 “주요 자회사 부진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익성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정비 증가로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라고도 판단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올해 상반기 실적을 쿠팡에 따라잡혔다는 점이다. 올 상반기 쿠팡의 매출액은 15조3749억원으로 이마트(14조4065억원) 매출액을 넘어섰다. 신세계(3조1393억원) 매출액을 더하면 여전히 신세계그룹의 덩치가 크지만, 신흥기업인 쿠팡에 이마트 매출을 역전당했다는 건 수모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지난해까진 좋았던 백화점 사업도 올해 들어선 상황이 반전됐다. 신세계는 올해 상반기 누적 매출이 3조1393억원, 영업이익이 302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견줘 각각 13.8%, 14.0% 줄었다. 고금리·고물가와 경기불황이 장기화되면서 고소득 고객이 이탈한 탓이다.

◇ 롯데그룹에도 부는 심상치 않은 바람
신세계그룹만 변화의 바람이 부는 게 아니다. 특히 쿠팡이 올해 첫 연간 흑자를 눈앞에 두고 질주하면서 정통 유통그룹인 롯데그룹에도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이다. 이에 롯데그룹 역시 조기에 큰 폭의 인사를 할 것이라는 전망이 솔솔 나오고 있다. 롯데그룹은 통상 11월 넷째 주에 정기 임원 인사를 12월 1일 자로 내는데, 이보다 일정을 앞당길 수 있다는 분위기다.
롯데그룹은 이미 신상필벌 인사를 예고했다. 적자 수렁에 빠진 그룹 패션 계열사 롯데GFR은 정기 임원인사를 앞두고 먼저 별도로 대표이사를 교체했다. 지난 9월 기존 이재옥 대표에서 신민욱 신임 대표로 수장을 바꿨다.
신 대표는 제일모직(삼성물산 패션부문) 해외상품사업부 팀장과 한섬 해외패션사업부 상무를 역임한 글로벌 패션 전문가다. 롯데GFR에 합류하기 전에는 프라다코리아의 리테일 디렉터를 지냈다. 외부 출신 인사 영입을 통해 고강도 혁신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롯데GFR은 2018년 롯데백화점 패션 사업부문인 GF사업부문과 자회사 엔씨에프를 통합해 출발했다. 당시 패션 사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한다는 전략 아래 2022년까지 매출 1조원을 올리겠다고 밝혔지만, 지속해서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롯데GFR 매출은 1150억원으로 전년(879억원) 대비 30.8% 성장했다. 반면 영업손실은 19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2억원 가까이 불어났다. 적자는 2019년 102억원, 2020년 62억원, 2021년 123억원, 2022년 194억원 등 5년째 이어지는 중이다.
특히 롯데그룹엔 내년 3월에 임기가 끝나는 CEO가 많다. 대표적인 게 김상현 유통군 총괄대표 겸 롯데쇼핑 대표이사 부회장이다.
김상현 부회장은 파격적인 외부 전문가 수혈 인사를 통해 2021년 롯데그룹에 들어왔다. 글로벌 유통기업 P&G 출신인 김 부회장은 사업 효율화와 고객 중심을 전면에 내세웠고, 지난해까진 호실적을 내며 성과를 내는 듯했지만 올해 실적은 정반대다. 롯데쇼핑의 상반기 전체 매출은 7조1838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보다 7.2% 줄어들었다.

정준호 롯데쇼핑 대표와 나영호 롯데온 대표 등의 교체 여부도 업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롯데쇼핑의 이커머스 플랫폼인 롯데온도 여전히 적자 상태다. 최근 들어 적자 규모가 줄어들곤 있지만, 시장 경쟁력을 갖췄다고 보긴 어렵다. 이커머스 업계 관계자는 “SSG닷컴이나 컬리 역시 흑자 경영의 길이 멀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시장에서 입지를 다져놓은 상태”라면서 “반면 롯데온의 경우 다른 이커머스 플랫폼과 어떤 차별점을 갖고 있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인 신유열 롯데케미칼 상무의 거취도 관건이다. 롯데가 3세인 신유열 상무는 지난해 8월 일본 롯데파이낸셜 최대주주인 롯데스트레티직인베스트먼트(LSI) 공동대표로 선임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한국 롯데케미칼 상무보에서 상무로 승진했다. 올해 7월에는 일본 롯데파이낸셜 대표이사로도 선임됐다.
신유열 상무는 올해 신 회장이 가는 곳마다 동행하며 경영 후계자로서 보폭을 키우고 있다. 신동빈 회장이 지난 9월 ‘롯데몰 웨스트레이크 하노이’ 개장식 참석을 위해 베트남에 출장을 갔을 때도 신 상무가 동행했다. 그러자 이번 인사에서 신 상무가 유통 분야로도 발을 뻗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쏟아졌다. 이번 인사에서 롯데의 핵심인 유통 분야로 발령이 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롯데그룹은 지난 여름 한국과 일본에 ‘미래성장태스크포스(TF)’라는 조직을 신설했는데, 일부에선 이 조직이 승계 작업을 맡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국적과 지분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다만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적극적으로 나선 2030부산엑스포 유치 여부가 11월 28일 발표될 예정이어서 이후 롯데 정기 임원 인사가 이뤄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면서 “어찌 됐든 인사가 발표되면 작은 변화에 그치진 않을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리더십 교체 문제는 비단 신세계와 롯데에서만 불거진 게 아니다. 전 세계 경기침체에 따른 내수 부진으로 유통업계가 전반적으로 업황과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올해 보수적인 유통 기업에서도 대거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라며 “불황의 여파로 부진한 실적을 낸 유통가에서 쇄신과 성과주의가 강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 SPC가 배스킨라빈스·던킨을 운영하는 BR코리아 대표로 스타벅스커피코리아(SCK컴퍼니) 출신의 40대 여성 CEO를 발탁한 것도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BR코리아 대표이사로 선임된 이주연 부사장은 1975년생으로, 연세대 의류환경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 스쿨에서 MBA를 마쳤다.

현대카드에서 디지털본부와 전략기획본부를 총괄하며 디지털 혁신과 핀테크 신사업 등을 주도했다. 이후 SCK컴퍼니 전략기획본부장과 최고 마케팅책임자(CMO)를 역임하며 사이렌 오더 등의 핵심 사업을 고도화하고 신규 디지털 플랫폼을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SPC그룹 내 주요 계열사에서 여성 CEO가 선임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진 타개를 위해 ‘빠른 쇄신’을 꺼내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BR코리아영업이익은 급감했다. 매출 7916억원, 영업이익 338억원을 기록했는데, 이중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57.2%나 감소했다.
◇ 전문경영인만 잘라선 문제 해결 안 돼
하지만 업계 일부에선 부진의 책임을 전문경영인만 짊어지는 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임기 만료를 앞두고 연임이냐 사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건 항상 전문경영인들이다. 이렇듯 부담해야 할 책임의 무게가 너무 막중하다보니 경영 역량이 뛰어난 전문가들이 CEO 자리를 기피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오너가 져야할 책임을 전문경영인에게 미룬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기업 리더십의 시스템은 크게 둘로 나뉜다. 바로 오너경영 체제와 전문경영인 체제다. 오너경영은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가 기업 소유주일 때를 말한다. 반면 전문경영자란 기업을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특정 산업에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경영자 지위에 올라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을 뜻한다.

과거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업은 그 기업의 지분을 많이 가진 오너가 직접 경영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시스템도 바뀌게 됐다. 기업이 거대해 지고 경영 내용이 복잡해지면서 조직 관리에도 전문적인 기능이 필요하게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 소유주가 해당 산업과 조직을 관리하는 데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찾아 회사 경영을 맡기면서 전문경영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시간이 갈수록 오너경영의 단점이 많이 부각됐다. 오너경영인은 해고당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에 대한 견제장치가 없고, 의사결정이 불투명하고 독단적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무리한 인수·합병과 사업 추진으로 그룹에 큰 어려움을 가져온 과거 재벌기업들의 사례는 오너경영의 폐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유통업계만 해도 프랜차이즈 산업에서 오너 일탈, 편법 경영 등 큰 문제들이 터져 나왔었다. 권한만 있고 책임을 지지 않는, 불평부당한 경영을 대체할 방안이 바로 전문경영인 체제로 보고 있다.
얼마 전 인사를 대폭 물갈이한 신세계그룹 역시 전문경영인 체제를 표방하고 있다. 오너일가는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전문경영인을 통해 경영한다. 그럼에도 신세계그룹에서 가장 주목받는 경영인은 그룹의 오너일가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다.
정 부회장은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81만명을 넘는 슈퍼 SNS 셀럽이다. 개인 SNS를 직접 관리하며 대중과 격 없이 소통한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경영인이란 호평을 받기도 하지만, 양면성도 있다. 그가 SNS에 올리는 피드가 구설에 휘말리면 회사 주가에도 악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일각에선 신세계 계열사에 대한 불매운동과 응원·지지의 움직임이 동시에 나타나기도 했다.

정 부회장은 기업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홍보도 활발하게 한다. 지난해 초 이마트는 자회사 신세계프라퍼티를 앞세워 미국 나파밸리의 고급 와이너리 ‘쉐이퍼 빈야드’를 3000억원에 인수했는데, 이는 평소 ‘와인 애호가’로 알려진 정 부회장의 결단이 결정적이었다고 알려졌다. 2021년 초 SK텔레콤으로부터 야구단(SSG랜더스)을 사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 부회장은 적극적으로 구단주 역할을 즐겼다.
다만 이런 대규모 투자로 인해 이마트의 재무부 담이 커졌는데, 정작 정용진 부회장은 이번 임원 인사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재계 관계자는 “전문경영인을 대표이사로 앉히고도 최후의 의사결정은 늘 오너들이 독점해 왔다”면서 “황제경영이란 말도 이렇게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면서도 경영상의 책임은 지지 않는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오너경영인은 심각한 사회적 일탈을 벌여도 언제든 복귀할 수 있다.
유독 리테일 산업에 그런 사례가 많았다. SPC 허영인 회장의 차남인 허희수 부사장은 2018년 불미스러운 일로 기업 경영에 손을 뗐다가, 2021년 복귀해 현재는 그룹의 디지털 전환과 신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전략본부장 역시 과거 논란을 딛고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는 오너경영인이다. 유통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브랜드로 평가받는 파이브가이즈는 김동선 본부장이 주도한 첫 번째 신사업이었다.
김 본부장은 파이브가이즈 본사를 직접 찾아 브랜드의 한국 진출을 이끌었다. 이선호 CJ제일제당 식품성장추진실장 경영리더 역시 과거 구설수에 휘말렸다가 경영에 복귀한 케이스다. 초고속 승진을 통해 승계 작업의 발판을 다지고 있다.
롯데그룹만 해도 꽤 오랜 기간 오너 일가의 형제간 다툼으로 곤욕을 치렀다. 신사업 발굴과 M&A 투자 결정 등에 적지 않은 지장을 받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롯데그룹을 진두지휘하는 건 신동빈 회장이고, 장남인 신유열 상무는 경영권을 물려받을 게 확실하다.
물론 한쪽에선 전문경영인이 모든 걸 도맡는 시스템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전문경영인들은 짧은 임기 동안에 성과를 높이기 위해 투자보다는 비용 줄이기에 나서고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옳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문 경영인들은 오너나 주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긴 안목이 요구되는 큰 승부와 결단에 약하다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커지는 경영 불확실성에 업종과 지배구조를 막론하고 오너의 역할론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면서 “국내 경영 여건상 모든 리스크를 감당하고 결단을 내릴 만한 사람은 오너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다만 지금처럼 전문경영인만 갈아치우는 방식으로는 실적 부진을 탈출할 수 없다. 오너 경영인을 견제할 수단이 마땅히 없는 지배구조라면 말만 전문경영인이지 오너일가의 수족에 불과한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요즘 인사를 보면 우리나라 전문경영인의 운명이 얼마나 척박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면서 “오너가 질 책임만 잔뜩 떠안고, 권한도 별로없으면서 상대적으로 대부분 보수도 적은 한국의 전문경영인들이 설자리가 언제 마련될지 지켜볼 시점”이라고 지적했다.